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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열린인터뷰 일문일답] 문성근의 눈물, 노무현의 눈물, 국민의 눈물

2010.11.11





역시 문성근이었습니다. ‘100만 민란’의 선봉으로 두 달 반을 쉼없이 달려오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질 만큼 말을 많이 했다”던 그는, 비록 몸은 지쳤을지언정 그 의지와 신념은 전보다 더욱 또렷해보였습니다. 기어이 또 사람들의 눈물샘을 터뜨려버린 문성근의 명연설 같은 명답변을 이 자리에서 공개합니다.

-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유쾌한 100만 민란 프로젝트” 이름이 굉장히 길다.

처음 조직체를 만들 때 지었던 이름은 간단명료한 ‘국민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시민사회단체와 정당 지도자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는 과정에 나는 이것이 ‘민란’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 조직 발기(發起)를 준비하면서 ‘민란’이라는 말이 주는 무거운 느낌을 덜고, 한 송이 꽃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시민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더해 ‘100만송이’와 ‘유쾌한’이라는 카피를 추가했다.

- ‘100만’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100만 민란은 ‘민주주의 사회는 시민이 주인이고 주권자’라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고, 우리가 깨어있는 시민임을 확인하는 운동이다. 민란을 준비하면서 1974년 살벌했던 유신 초기 장준하 선생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면서 구속된 사건을 떠올렸다. 긴급조치 1호, 4호 등이 선포되면서 개헌을 이야기하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공포의 시대였다. ‘100만’에는 그때의 절박함, 결의를 되새겨보자는 의미도 포함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시민운동이 굉장히 많이 이뤄졌고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런데 이번에 민란의 취지를 설명하러 16개 광역자치단체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정당의 분열구도가 시민모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민란은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각각의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바다에서 만나자는 노력이기도 하다.

“모이자, 총선이 코앞이다!”

- 민란 가입회원이 3만 명을 넘었다. 그간 활동과 온라인의 파급력을 생각할 때 환호만 할 수 없는 규모라는 반응도 있다.

회원증가 속도가 느리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명도 높은 유력한 정치인 없이 운동을 진행하고 있고, 지금은 선거나 촛불정국 등 전투국면이 아닌 평상시다. 게다가 2012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제법 되고, 선거일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도 많은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3만 명이 모였다는 건 의미가 크다.

2012년 대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치르게 될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에 따라 대선의 향방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년 1월은 2012년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가 모든 언론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민주진보진영이 어떻게 융합을 하든 간에 그 전에 이 모든 안을 놓고 어떤 게 현실 가능한 것이냐, 어떤 게 승산이 높은가를 준비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금은 군불을 때듯 밑에서부터 다져가는 과정이다.

- 혼자서 전국을 도는 게 힘들거나 지치지는 않나? 우스갯소리지만, 혹시 주변에 문성근만큼 인지도를 가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아서는 아닌지...

처음 의견을 제시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조기숙 교수나 이창동 감독, 김두수씨 등 많은 분들이 함께 했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중문화인 등 최초 제안자도 60여 명에 이른다. 전국을 발로 뛰며 국민과 만나는 일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큰 일이다. 운동의 취지를 잘 모르거나 반대하는 시민들을 만나면 참 곤혹스럽다. 심지어 “니 애비부터 싫었어, 이 빨갱이야!”라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견딜 수 있다. 어느 정도 면역이 돼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냉랭함을 견디려면 자기훈련이 필요하다. 민란이 전국으로 널리 알려지고 광범위하게 들불이 퍼질 때까지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 11월 13일 열리는 ‘우금치 다시 살아’ 행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동학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민주적인 혁명운동이었다. 인내천(人乃天), 다시 말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핵심으로 한다. 지금은 국민이 주인인 시대다. 뒷걸음질 치고 있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되살리자는 뜻에서 동학의 마지막 전투이자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던 우금치를 민란의 모임장소로 잡았다. 우연하게도 우금치 전투가 벌어졌던 시기도 딱 요맘때다. 준비하면서 놀랐는데, 지난 100년 동안 우금치에서 동학 행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 믿는다.

‘우금치’ ‘민란’ 하니 너무 무거운 느낌이지만 모임은 아주 즐겁게 진행될 것이다. 오후 3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공주 시내를 행진하는 것을 시작으로, 오후 4시 공주교대에 모여 각 지역에서 가져온 막걸리를 한데 섞어 마시며 작은 축제마당을 연다. 5시부터 우금치를 향해 1시간 정도 다시 행진을 한다. 거기서 일종의 집체극을 할 것이다. 마지막에는 각 지역의 선봉이 되는 접주 자원자 150명에게 횃불을 전달한다. 야권단일화로 민주정부를 세우고, 남북관계를 개선해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 ‘접주’라는 말이 생소한데, 어떤 조직방식인가?

일반적으로 모임이나 조직은 피라미드 형태가 많다. 지역장을 뽑고, 그를 중심으로 지역 회원들이 활동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지역장을 뽑지 않고 15~30명의 소그룹을 구성해 그 안에서 접주를 자청하거나 뽑는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지역별로 새로운 접소를 구성하면 된다. 동학민란 때처럼 대접주를 뽑지 않고 대등한 관계의 접주가 여럿 존재하는 형식이다. 접주는 의견을 공유하거나 행사를 같이 진행할 수 있지만 여기에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각 접주 의사에 따라 참여와 불참을 결정할 수 있다.



“노무현 한 사람의 목숨으로 부족합니까?”

- 100만 민란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으로 슬퍼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1주기가 있던 지난 5월 추모공연과 강연, 유세지원 등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창원에서 5분간 연설을 요청받고 준비하던 중 당시 김두관 후보를 만났는데, 하도 힘이 없어보여서 선거준비 때문에 그런가 싶어 “그동안 몇 번이나 떨어졌냐”고 물었더니 “7번”이라고 하더라. 힘내라는 말밖에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문득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가 생각났다. 2009년 3월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나는 이제 힘이 미약하니 너는 끝까지 남아서 싸우라” 하셨고, 2008년 가을 술 한 잔을 건네던 노무현 대통령께선 “허망하다”는 말을 했다. 고향 봉하에 내려와 살면 열린우리당이 전국정당으로 서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생각했는데, 결국 공중분해된 것이 가슴이 아프다는 뜻이었다. “부산에서 콩이면 대구에서도 콩이고, 광주에서도 콩이어야 한다”던 그의 외침. 지역통합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의 “허망하다”는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라. 오래된 생각이다”라는 유언이 마치 “나는 죽어서 봉하 땅에 묻혀서라도 지역구도 척결의 상징으로 이 땅의 정치를 바로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준비했던 원고를 찢어버리고 연단에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은 살아서 자기 머리 찧어가며 맞서다 끝내 머리가 깨져서 죽었습니다. 여기 김두관 후보가 노무현이 걸었던 길이 옳다고, 지역 대결 구도를 반드시 깨버리겠다고 나섰습니다. 노무현 한사람의 목숨으로 부족합니까? 그러면 김두관도 죽이시죠. 또 떨어뜨리시죠.” 좌중은 우리의 승리를 목청 높여 외쳐주었고, 결국 김두관 후보는 6.2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로 당선이 되었다. 그때 생각했다. 슬픔은 여기까지라고. 대통령님의 뜻을 이어 동서통합은 물론 진보진영의 대통합을 이뤄내야 한다고.

- 100만 민란, 왜 지금이어야 하는가?

어느 초등학교 참고서를 보면 민란을 ‘우리 선조들의 정치참여 방식’이라고 정의한 것이 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때는 정권의 부정과 헌법을 두고 싸웠고, 87년 6월항쟁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간 우리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 시대, 우리는 왜 방관자처럼 골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지역구도 척결의 노력이 6.2선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허나 사람이 죽어서 주는 정서적인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열기가 전 같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다. 내후년 4월 총선에서 이기지 못하면 대통령 후보고 뭐고 정권교체의 가망이 없어진다.

“제발 우리 서민들 좀 살려주세요”

- 100만 민란은 단기간에 끝날 운동이 아니다.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텐데 ‘군자금’ 운용에는 문제가 없나?

오랜 시간 준비하고 조직을 만든 것이 아니라서 사무국을 꾸리는 것이나 홈페이지 운영, 그리고 전국을 도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녹록치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3만 명의 회원가운데 30%에 이르는 회원이 정기후원을 해주고 있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후원금을 보내주는 분들도 여럿 있어 경제적으로 많이 쪼들리지는 않는 편이다. 또 이쪽 사람들이 흔히들 ‘1/N’이라고 해서 필요할 때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 인색치 않지 않은가?

100만 민란의 1차 목표는 2012년에 진보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지만 이후에도 시민정치 운동으로 존속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낀다. 진보세력에서 대통령이 나온다고 해도 당선 이후 그가 제대로 국정운영을 펼칠 수 있게 돕는 보호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시절 그런 뒷받침이 없어서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다. 정권을 창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판과 동시에 정책을 제안하고 보호하는 힘도 갖춰야 할 것이다.

- ‘100만 민란’이 시작된 지 80여 일이 되었다. 그동안 느낀 점이 있다면.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발 우리 서민들 좀 살려달라”는 애원이다. 100만 민란은 정당이 아니라 정치운동임에도,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싶은 것이 바로 지금 서민들의 심정이다. 또 하나는 두려움이다. 현 정권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방법으로 국민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있다. 민란에 회원가입하려면 주민등록번호를 써넣어야 하는데, 혹시나 그것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신시대를 경험했던 우리들은 단련이 되었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대를 살았던 지금의 10대, 20대들의 입장에서는 전에 몰랐던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진영, 진보진영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따로 살아서 뭐 덕을 본 것이 있나? 지금 우리가 손을 잡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10년의 국정경험과 10년에 대한 반성, 현 정부가 보여주는 반면교사적인 모습을 교훈삼아 뭉치면 정말 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남을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부족함이 보여도 이 운동이 갖는 의미가 있으니 적극 알리고 동참하면 좋겠다. 지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제시한 여러 목표를 향해 가면서 열심히 하겠다. 많은 의미를 담고 가는 일이라 어떤 결과를 보더라도 이것은 남는 장사다. 유쾌함을 잃지 않고 나아가겠다.

-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면 엄청난 아우라가 느껴진다. 원래 그렇게 말을 잘 하는가?

2001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선거캠프에서도 딱히 주문하는 게 없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민주화운동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면서 노무현이 유일한 카드임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뜨악해했다. 내가 안하던 짓을 하고 다니니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나는 이게 내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쯤 부산에서 출판기념회가 있었는데, 사회를 보던 명계남이 느닷없이 나를 연단 위로 불러 세웠다. 임기응변으로 평소에 생각했던 동서통합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그때부터 나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말재주가 늘더라. 정당 행사처럼 중요한 행사에서는 미리 원고를 준비해서 꼼꼼하게 체크한다. 물론 연극무대 경험도 좋은 보탬이 된다.



문성근의 눈물, 노무현의 눈물, 국민의 눈물

- 2002년 개혁국민정당 창당발기인 대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눈물’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으로 회자된다. 문성근의 눈물이 노무현의 눈물로, 노무현의 눈물이 수많은 지지자의 눈물로 이어진 희대의 명연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잘 아는 이들은 그를 “분노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정치인은 발언을 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에 앞서 이를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먼저 계산한다. 이는 한국교육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본성을 억제’시키는 습관의 하나이기도 하다.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식의 박제된 행동양식 말이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있는 그대로에 반응하고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실수를 낳기도 하지만 본성을 억제하지 않는, 그래서 항상 콤플렉스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노무현의 눈물’이다.

-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뒤 스크린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곁에서 그를 보좌하며 노무현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하지 않았나?

아버지 문익환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평소 나는 아버지를 ‘문목사’라고 칭한다. 역사적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로서 그분의 삶에 대해 큰 아픔을 가지고 있다. 방북 뒤 아버지가 재판을 받을 때 판사의 태도가 너무 무례해 항의를 하다 감치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고맙게도 아버지가 수감되어 있는 안양교도소로 보내졌다. 3미터 담장 너머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의 어깨를 빌어 벽을 뛰어넘었다. 복도 쪽 창문 너머로 아버지를 보는데 가지런히 정돈된 방에 아버지가 누워있는 게 보였다. 행여나 저런 모습으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아버지는 생애 마지막 17년 반 중에 12년 3개월(6번)을 수감생활을 했다. 나는 아버지의 삶은 시비대상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다만 87년 양김의 분열로 민주진영이 대선에서 실패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세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도왔다. 아버지의 순결한 삶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라도 떠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것이 배우 복귀였다. 결과적으로 나의 복귀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번 민란에 후배나 동료들을 적극적으로 이끌지 않은 이유도 같다. 반면교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던 이들이 노무현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500만 명의 추모인파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라는 용어를 해금시키는 등 우리 역사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서거 전까지 ‘존경하는 대통령’ 설문조사에서는 늘 박정희가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보다 앞선 수치를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앞서기 시작한 것은 서거 이후다. 지난 6.2 선거는 두 가지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지역대비 구도가 완화되는 기미를 보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선거공약이 여야 구분 없이 ‘복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당이든 야당이든 ‘삽질’이 대부분이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MB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이 800만 명이 넘었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등 민주정부 10년을 퍽퍽하게 느꼈을 수 있다.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저주가 합리화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는 한나라 정권이 불러들인 IMF의 각서를 받아들고 출발했다. 국민들은 박정희의 개발중심·고속성장 모델과, 힘들었던 민주정부 10년의 모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이명박 정부다. 그러나 국민들은 다시 2년 만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민주정부 10년의 반성과,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의 뜻을 지지하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놈이 그놈? 우린 ‘다른 놈’을 키우자

- 정치판을 두고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보수가 정권을 잡든, 진보가 잡든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체념이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그놈이 그놈”이란 말은 정치와 시민이 서로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과거 유신독재 시대부터 ‘정치란 더러운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한 까닭도 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이명박과 노무현이 같은가?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학자) 노암 촘스키는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팽배하는 것을 두고 “인류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망한다. 온라인을 기점으로 시민들이 뭉쳐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잘못된 체제나 체계를 당장 개선하거나 재조립하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최대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시민들의 역할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람사는 세상’은 어쩌면 이상사회일 수도 있다. 이상은 금방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나아가 거기에 가까워져야 한다.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가면서 아버지 세대를 설득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놈이 그놈’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내 키워야 한다.

-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4대강이나 야권단일화 같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스펙 쌓기’다. 이들을 어떻게 끌어 모을 것인가?

요즘 젊은이들에게 역사 인식, 현실참여 인식이 부족한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교육의 문제다. 한국은 자신의 역사(현대사)를 가르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르면 요즘 한국 현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10명이 채 안된다고 한다. 사실상 학교에서 현대사를 가르칠 전공자마저도 없는 형편이다. 그리고 산업구조 자체가 바뀌면서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5공화국 때 대학설립을 무한정 허가하면서 폭발적으로 대학이 늘어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대학진학률은 85%로 세계 1위다. 2위인 일본이 35%라는 점만 봐도 엄청난 과잉 아닌가.

이제 일자리는 복지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 산업이 발전한다고 일자리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4대강 사업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우리 가족에게 과연 그들이 큰소리친 것처럼 일자리를 가져다주었나? 어떤 성격의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일자리정책도 달라진다. 참여정부는 복지예산을 늘려 일자리를 늘리려고 노력했다. 일자리 문제는 정책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동시에 젊은이들이 현실을 몰라서 스펙 쌓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정치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꾸준히 설명하고 다가서며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성근과의 짧은 인터뷰

- 노무현 대통령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잘못된 것을 보면 분노한 사람

- 문성근에게 ‘사람사는 세상’이란?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세상

- 문성근에게 연극이나 영화는? 제일 편안한 동네

- 문성근에게 정치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공동체 구성원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일

- 문성근에게 아버지 ‘문익환 목사’는? "내가 죽을 차례"라는 마음으로 사셨을까? 늘 죄송한 분

-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싶은 일은? 연기와 시민정치운동

-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둘째 딸이 대학원에 합격한 일

- 지금 가장 후회하는 일은? 없음

-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아름다움

- 본인의 매력 포인트는? 모름

- 최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문익환 목사의 부모인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의 고만례 부분

-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 꼭 가보거나 여행하고 싶은 곳은? 백두대간의 북쪽 지역

- 지금 자신을 위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휴식

- 2013년 뭘 하고 있을 것 같나? 강원도에서 산악 트레킹코스를 개발하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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