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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양정철의 특별한 만남1] “문재인 실장을 보면 노대통령 생각이 나서요!”

2010.12.02







1년 전쯤인가요. 노무현재단 사무실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홍대 근처 건물 몇 군데를 그와 같이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한 건물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30대 여성이 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TV에서만 보던 유명한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하겠죠.

처음엔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더니 잠시 뒤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도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당황스러웠습니다. 잠시 후 마음을 진정시킨 그 여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재인 실장님을 보니 노무현 대통령 생각이 나서요.”

문재인. 그와 노무현 대통령을 떼서 보긴 어렵습니다. 노무현과 청춘을 함께 한 노동-인권변론과 민주화운동,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참모, 마지막 비서실장, 서거 전 마지막까지 노무현을 지킨 사람. 그리고 그의 서거를 비통한 표정으로 국민들에게 알린 사람. 그리고 이제 노무현의 추모기념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

의외로 알려진 게 없는 그를 찾아 나서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한 번, 노무현재단 상임이사로 또 한 번 그를 모셨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수가 적고, 불필요한 업무 외의 얘기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만남’의 첫 상대로 그를 찾아간 것은, 유명하지만 의외로 그 자신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게 많지 않고 사실 제가 궁금한 게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둘만의 ‘특별한 만남’은 11월29일, 부산 법조타운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 안녕하셨어요? 여전히 변호사 일, 노무현재단 (이사장) 일, 봉하재단 (감사) 일로 1인 3역을 하시느라 바쁘시겠어요. 감당하실 만하세요?
“우선은 변호사 일이 본업이니까, 여기 매일 꼬박꼬박 출근하죠. 노무현재단 일로는 매주 하루 서울에 다녀오고, 또 봉하도 매주 한번 다녀오고요. 그런데 아직 (변호사) 본업이 시원찮아서…. 어쨌든 감당할 만합니다.”

- 법정에 직접 나가진 않으시죠?
“조작간첩 재심사건이랄지, 중요한 사건은 법정으로 나가기도 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계획이에요. 그런데 아직 사건 수임이 별로 없어요.”

- 거기다가 도리와 인정 때문에 (돈이 안 되는데도) 맡고 있는 사건이 꽤 많지 않으신가요?
“그래도 이 법무법인에 소속돼 있고, 원래 청와대 가기 전에 여기 대표 변호사였기 때문에 염치없게도 다시 대표 변호사로 복귀했는데요. 기여가 그리 크지 못해서 구성원들에게 좀 미안하죠. 그러나 뭐 다 이해해 줄 걸로 생각합니다.”

- 최근에 조현오 청장 망언, 노 대통령 묘역훼손 등 불미스런 일이 계속 이어져 누구보다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습니다.
“그렇죠.”

조현오 망언, 특단의 행동 강구

- 조현오 청장 망언에 대해선 처벌은커녕 수사조차 아무 상황변화가 없는데, 특단의 대응이 필요한 시점 아닌가요?
“조 청장 건은 지금 우리가 고소-고발한지 거의 3개월 반 정도 돼 가는데 아직도 피고소인 조사조차 되고 있지 않거든요. 그 동안은 G-20 행사도 있었고, 현직 경찰청장이기 때문에 검찰이 그런 점들을 고려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 너무 늦어지고 있죠. 그래서 계속 이렇게 늦어지게 되면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검찰의 수사지연 또는 직무유기를 규탄하는 특단의 행동을 강구해야겠죠. 그럴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 재단 이사회에서 묘역 관리체계 보완책도 마련됐죠?
“우선 급한 대로 묘역관리 인원을 세 명 정도 늘려서 교대로 상주를 하도록 보완책은 마련했어요. 그러나 그 넓은 묘역을 재단이 완벽하게 관리해서 지난 번 같은 사태를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국가보존묘역이니만큼 국가가 기본적인 관리나 경비를 제대로 해야겠지요. 그 부분은 관련 법 개정이 국회에 제출됐고, 이번 정기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법 개정이 된다 해도 경비나 관리로 그런 일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결국 보복과 적대적인 정치문화,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그저 타도하려는 정치문화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법이겠지요.“

- 권양숙 여사님 충격이 더 크실 텐데 괜찮으신가요?
“아니요. 묘역훼손 사건은 그 자체로 충격이 크셨고, 더군다나 유사한 모방 행위가 뒤따르지 않을까 아주 걱정이 많으시죠. 그러다보니 심지어는 묘역개방을 제한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까지 내셨습니다. 말하자면 헌화대 까지만 개방을 하고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끔 통제하는 것이 어떠냐는 건데요. 사실 그럴 순 없죠. 국민들이 함께 참여해 조성한 묘역이고, 누구나 오면 참배할 수 있도록 개방이 돼 있잖습니까. 묘역 저 안쪽까지 국민박석이 깔려 있어서 그렇게 개방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죠. 여사님도 그런 사실을 잘 아세요. 하도 답답하고 걱정되니까, 그런 말씀까지 하신 거 아니겠어요. 어쨌든 그럴수록 더 의연하게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더 충격이 큰 것은 부엉이 바위에서 한 분이 몸을 던진 사건이죠. 아주 참 가슴 아파 하셨어요. 물론 부엉이 바위에도 출입을 통제하는 펜스가 현재 설치돼 있긴 합니다. 펜스를 보강할 수 있겠지만, 억지로 타 넘어가는 걸 막을 순 없기 때문에 걱정이죠.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게 결코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행위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누가 된다, 그리고 유족들 마음을 아주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봉하에 ‘노무현 기념관’ 건립…작업 착수

-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작업이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그렇죠?
“노 대통령은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아예 퇴임 후 봉하에 가 사셨고 봉하에 생가와 사저가 있고, 거기에 묘역도 있고 하니 기념관을 짓게 된다면 장소가 봉하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현재 권양숙 여사님이 머무르고 계신 사저를 적절한 시기에 재조성할 계획이죠. 그래서 노 대통령 퇴임 이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기념시설로 만들어 개방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습니다. 또 봉하에 추모영상관이 있는데, 가설 건축물로 허가받은 것이거든요. 그 시설을 보다 제대로 된 건축물로 확대해서 하나의 기념관으로 꾸민다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봉하를 그렇게 해서 생가, 사저 기념시설, 묘역,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추모기념 공간으로 구성하려고 하구요. 다만 서울에서도 시민들이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노무현센터 같은 게 필요하다는 의견인데, 아직 부지나 컨셉 등에 대한 합의, 마스터플랜 같은 건 마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재단에서 관련 기구를 만들어 앞으로 논의를 해 나가야 될 일이죠.”

-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난감한 요청을 받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여전히 같은 원칙을 갖고 계신 거죠.
“네.”

- 그 이유도 여러 번 언론에 밝힌 내용에서 변함이 없으세요?
“네.”

그는 이 두 질문에 대해 아주 짧은 단답형으로 답했습니다. 어떤 설명이나 사족도 달지 않았습니다. 좀 민망했습니다. 사실,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으로 그를 모실 때 그는 대부분의 언론 인터뷰를 극도로 피했고, 많은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건 저의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관심사가 그것이었고 그에 대한 입장이 워낙 확고한 걸 누구보다 제가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한 건 1주기를 앞두고서였습니다. 추모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해야 되지 않겠냐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묻고도 민망할 수밖에요. 방향을 돌려봤습니다.

- 대선후보로 나오면 좋겠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많기야 하겠어요? 저를 괜찮게 생각하는 분들이 일부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지 모르겠는데, 음…. 그렇게 현실성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도 대단히 신중하고 완곡하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러면서 역시 짧게 답했습니다.

정치일선에 나서고 싶지 않아…대통령 일만

- 지금까지 현실 정치와는 계속 거리를 두셨지만, 잇단 선거에서 대통령과 특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역할엔 나름 성심을 다하셨습니다. 마침 지난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김두관 이광재 유시민 등 대통령을 모셨던 분들의 약진은 참 반가운 일인데요. 그들에게 장차 뭔가 도움이 되는 역할을 요청받으신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특히 다음 선거에서 민주진영전체의 승리를 위해선 어떻게든 역할을 하셔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실 것 같은데요.
“우선 우리 진보-개혁진영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해야 된다, 이런 점에 대해선 전혀 생각이 다를 바가 없어요. 또 거기에 필요한 기여를 누구나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꼭 정치일선에 나서지 않더라도 각자가 자기 영역에서 도울 수 있는 역할이 다 있다고 생각해요. 나 같은 경우는 두 가지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해야죠.

하나는 노 대통령에 대한 추모 기념사업을 통해 노 대통령에 대한 정신이나 가치를 붙잡고 확산시켜 가는 일이죠. 그런데 이건 노 대통령 개인에 대한 단순한 추모나 기념에 그치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이명박 정부가 워낙 비민주적이고 퇴행적이고 폭압적인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잖아요? 지금 그런 부분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대비시켜서 심판하는 일에 대해선 역시 노무현 정신, 노무현 가치와 대비시키는 것만큼 적절한 방법이 없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드러났죠. 그렇게 간접적으로 도움이나 역할을 하고요.

또 하나는,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참여정부나 노무현 대통령에 머물러선 안 되죠. 뛰어넘어야 되죠. 참여정부도 한계가 있었고, 역량부족도 있었고, 실패한 부분도 있고요. 그런 부분들을 좀 제대로 분석하고 성찰해야 우리의 집권능력과 국정능력이 커지면서 집권가능성도 커지는 거죠. 그러려면 참여정부 5년에 대해서 정말로 굉장히 꼼꼼한 복기가 필요합니다.

바둑에서도 실력을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복기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직 잘 안 되고 있어요. 뭐 약간 단편, 단편, 또 개인적으로 시도는 있지만 종합적으로는 안 되고 있어서 이게 언젠가는 해야 될 일이죠. 그런 일이 된다면 내가 참여정부에 대해선 그나마 긴 시간 동안 깊이 있게 몸을 담갔기 때문에 꼼꼼히 복기하는 일에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어쨌든 정치일선에 나서는 건 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희정 이광재 김두관 유시민 등 대통령 모셨던 분들이 지방선거에서 성공을 거둬서 우리가 다 기쁘죠. 우리가 그들에게 희망을 걸게 됐고, 이분들이 앞으로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분의 정치를 돕는 일은…. 저는 대통령님 정치를 도왔던 것으로, 저로선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이 힘을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어떠세요?
“원론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동의하고요. 추진방법에 있어선 개인적으로 문성근씨가 하고 있는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그걸 지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최근 검찰의 행태를 보면서 법률가로서, 전직 민정수석으로서, 또 비서실장으로서 이 문제에 천착했던 분이어서 소회가 남다를 겁니다. 검찰개혁의 요체는 뭐라고 보고, 개혁은 어떻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신가요?
“역시 검찰개혁에 대해 출발선이 되면서 가장 중요한 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말하자면 정치검찰로부터 벗어나는 게 개혁의 핵심이죠.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으로 활용하려는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고, 정치권력이 검찰을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거든요.”

참여정부 시절 중수부 폐지 추진…실행 못해 아쉬움

- 참여정부 때 그렇게 했잖습니까?
“그러나 그게 한 정부 기간 동안 된다고 해서 뿌리를 내릴 순 없는 일이죠. 적어도 2,3대 대통령 임기를 거치면서 반복돼야 문화로서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명박 정부 들어 한꺼번에 퇴행해 버린 것이 안타깝죠.

역시 검찰개혁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다만 제도적으로도 검찰의 정치성을 제거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은 중수부입니다. 대검은 각급 검찰(고검이나 지검)을 지휘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인데요. 지금 이미 공안이나 다른 분야는 다 그래요. 유일하게 대검이 직접수사기능을 갖고 있는 게 중수부에요. 세계적으로 그런 사례가 없어요. 일본도 동경지검 특수부가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하는 것이지 검찰청에 중수부가 있진 않아요.

이 부분은 처음 강금실 장관이 법무부 장관할 때 검찰개혁의 상당히 중요한 목표로 삼았던 대목이에요. 그런데 그때 못했던 배경이 있습니다. 중수부 폐지를 시행하기 전에 대선자금 수사가 있었는데, 그걸 대검 중수부가 대단히 엄정하게 했어요. 물론 그건 대통령이나 참여정부가 검찰이 정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수사할 수 있게 보호해 줬기 때문이죠.

이 수사로 검찰이 국민들로부터 대단히 높은 신뢰를 받게 됐단 말이죠. 그 바람에 중수부 폐지론이 대단히 희석되게 됐어요. 그 뒤에 정권이 중수부 폐지를 추진하게 되면 마치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보복, 그런 인상을 줄 소지가 컸죠. 그래서 그냥 넘어오게 된 겁니다. 아쉬운 대목이죠. 어쨌든 중수부는 폐지하고 그 기능은 각 고검, 지검으로 분산될 필요가 있죠.

그러면 검찰의 정치적 중립만 이뤄지면 검찰의 민주적 통제까지 이뤄지냐, 그건 아니죠. 그건 아니지만, 정치적 중립만 이뤄지면, 말하자면 검찰권의 민주적 행사 그런 부분도 상당 부분 자연스럽게 이뤄지리라 봅니다.

그래도 남는 건, 검찰의 조직 위계 같은 것 때문에 검찰이 스스로 잘못하는 것, 피의사실 공표, 위법행위, 당연히 기소해야 할 사건을 어영부영 권력의 눈치를 보든 자본의 눈치를 보든 아니면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이든 제대로 기소하지 않고 검찰권을 행사하지 않는 일들은 직무유기 범죄죠. 이런 것들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고, 처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요. 검찰이 자기 식구라 할지라도 검찰권을 행사하면 되는 거지요. 그게 안 되고 있는 게 현실이어서, 그게 가능할 때까지라도 한시적으로 공수처 같은 걸 설립해서 검찰권에 대해서도 통제가 되게끔 할 수 있는 제도, 그런 정도가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싶네요.”

이런저런 현안에 대해선 충분히 물어본 것 같아 개인적 영역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과의 애잔한 추억과 잔영이 궁금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서거 전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였고,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으세요?
“서거 전이라 하면 나로선 애매한 게 있는데, 부산대 양산병원에서 뵀죠. 그때 비록 인공적인 생명연장 장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때 살아계셨고 심장박동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나중에 여사님 동의를 구해서 인공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돌아가신 것이어서 그때 마지막 모습을 뵀는데, 그때는 참, 참혹했죠. 참혹했고…. 그래서 정말로 황망한 속에서도 ‘아, 이 모습대로 여사님 보여드릴 수는 없는데 어떡하나’ 하는 그런 걱정이 제일 컸어요.”

대통령님 인공장치 제거하면서 서거…그게 마지막 만남

뜻밖이었습니다. 봉하에서의 마지막 만남을 물은 것인데 가장 아픈 기억의 한켠을 끄집어 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고 이전에 마지막 뵌 게 언제냐면, 한 1주일 이전으로 기억납니다. 그때는 (서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그때만 해도 검찰의 소환조사까지 다 끝난 상황이었고, 검찰이 어떻게 사건 처리를 할지 예상하면서 대응을 논의하고 있었어요. 그런 대응에 대해서 대통령님도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더 보태자면 그때 이미 검찰이 소환조사 후 3주 이상 아무런 조치를 못하고 있었어요. 그것은 그 정도로 검찰이 박연차 회장 진술 외에는 확보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때 이미 우리는 구속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예상하면서, 검찰이 체면상 기소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는 수준이었죠. 그러나 기소해도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충분히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었어요. 대통령도 확신하셨고.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 봉하 있을 때 제 기억으로는, 봉하에 있던 참모들이 서거 전 마지막 주말에 이사장님과 전해철 전 민정수석이 한번 오셨으면 했는데, 당시 두 분 다 굳이 오실 필요가 없는 상황이어서 아쉽게도 한 번 더 뵙지를 못했죠.
“그 마지막 1주일을 안 갔던 것이 굉장히 큰 회한으로 남아 있는데…. 내가 그때 갔다고 해서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아니라…. 우리 대통령의 스타일을 다 알지만, (유서내용이) 굉장히 가다듬은 거잖아요. 대통령 글 쓰시는 스타일이, 일단 많이 써 놓고 압축하면서 가다듬어 나가는 그런 스타일인데…. 유서를 보면 굉장히 가다듬은 것이 보이거든요. 심지어 유서의 맨 첫 번째 문장,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그 문장은 컴퓨터로 작성하면서 다른 내용 다 입력해 놓고 나중에 추가해서 입력한 것이거든요. 말하자면 머릿속에 유서를…. 언젠가는 모르지만 적어도 며칠은 머릿속에 담고 사셨다는 건데…. 우리는 그걸 까마득하게 몰랐던 거지요.”

아차 싶었습니다. 괜히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던 그의 눈가가 금세 충혈됐습니다. 말이 자주 끊겼습니다. 그 상처를 꺼내자는 건 아니었는데, 서거 전 주말에 한 번 더 못 뵌 게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지 않느냐는 정도의 질문이었는데, 그 때 찾아뵙지 못한 것이 그에겐 깊고 깊은 자책과 회한과 통한으로 남아 있었던 겁니다.

당시 같은 상황의 전해철 전 민정수석 일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전 수석 역시 노 대통령 영결식 후 봉하에 있던 후배들과 고인의 생전 이야기를 나누다 같은 일을 얘기하며 회한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모두가 함께 꺼이꺼이 울었던 그 기억을 떠올렸다면 꺼내지 말았을 얘기인 것을….

서거 전 한 번 더 뵙지 못한 일 큰 회한

“그때 안 갔던 것은, 검찰이 아무 조치를 안 하고 있던 상황에서 대응회의 같은 것이 오히려 대통령께 스트레스 드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리고 대통령님도 가족들 얘기가 붉어져 나온 것에 대해, 우리한테도 참 민망해 하셨어요. 그래서 자꾸 가는 게 대통령을 오히려 힘들게 만드나 싶어서, 검찰이 저러고 있는 사이에 좀 잊어버리고 계시라고 안 갔던 건데, 그 기간 동안에 대통령 혼자서 머릿속에 유서를 담고 사셨다는 생각을 하니까 진짜….

-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것 같습니다. 참모들 가운데는 인생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훼손된 사람도 있을 만큼 심한 후폭풍을 겪은 것 같은데요. 누구보다 충격이 크셨을 것이고 가장 참혹한 일들을 가까이서 겪어서 트라우마가 더 컸을 텐데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나는 이겨내지 못했어요.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한 정신과 의사가 우리(노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 대개가 정신적 내상들을 크게 입어서 상담 같은 게 필요하다, 그렇게 말했다는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아직 이겨내지 못했고요. 여전히 인생이나 세상사가 참 허망하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진짜 참 세상이 무섭죠.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일체 사회적 활동은 다 접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싶은 심정인데요. 노무현 재단, 추모기념사업, 이런 일들은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냥 참고 견디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노 대통령 서거 전까지 여론은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의 정반대 추모여론은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적 없으신가요?
“그렇죠. 착잡도 하고. ‘민심이라는 것을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나는 일반 국민들의 바닥 민심은 원래 노대통령의 원칙적인 모습들, 종로 버리고 부산에 내려와서 국회의원 출마해서 낙선하는 모습들, 이런 모습들, 노 대통령의 정신이나 가치들을 높이 평가를 했었던 것이다, 그게 기저에 있는 마음인데 워낙 언론이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계속 비난받고 공격받으니까 이분들이 자기들 판단에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마음들이 흔들리고 회의가 생겼다가 말하자면 대통령이 서거하시면서 대통령의 진정성을 다시 느끼면서 확연하게 다시 한 번 알게 된 것이다, 그리 생각해요.

일반 국민들의 민심은 대통령님의 가치나 정신에 대한 원래의 생각들이 돌아온 것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은 우리 지식인 사회, 심지어 진보적인 언론매체까지도 포함하는 그 분들의 대통령 수사 당시 태도. 용서도 안 되고, 우리의 지적인 풍토가 참으로 실망스러웠고요.”


대통령님과 나의 관계, 운명인 듯

- 노 대통령 처음 만나신 게 82년이셨죠? 이사장님 나이로 보면 거의 반 정도 인생역정을 함께 해 오신 셈입니다. 이사장님 인생에서 노 대통령은 어떤 의미인가요?
“청와대 생활이 하도 고생스러워서 청와대 퇴임하면서 ‘이제는 해방’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일부러 집도 양산 시골로 이사를 갔던 거고. 어쨌든 앞으로는 여유 있게 내 삶을 살면서, 퇴임하신 대통령 일은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와드리고, 좀 여유 있게 살자 했는데 결국 지금도 보면 노무현재단 이사장하고 있지요. 나야 말로 ‘운명이다’ 싶네요.”

- 노 대통령과 함께 하면서 보람 있는 순간도 많았고 추억도 많을 텐데요. 반대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을 텐데.
“보람 있었던 것은, 역시 대통령 당선될 때가 제일 보람이겠지요. 당선된 그날은 부산 온 거리가 밤늦게까지 축제 분위기였는데요. 그게 뭐라고 해도 가장 보람 있었을 거 같고.

그 이전에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못할 만한 보람이 뭔가 하면요. 6월항쟁 초반 서울 명동에서 농성하면서 항쟁의 구심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해산을 해버렸어요. 졸지에 운동의 구심이 사라지고 동력이 뚝 떨어져서 서울 쪽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죠. 그때 노 대통령이 부산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이셨고, 나는 그냥 상임집행위원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이러다가는 정말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이제는 우리가 바통을 이어받아서 해야 된다.’ 그래서 서울 항쟁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부산에서 정말 크게 일어났어요.

잘못하면 꺼져갈 것 같은 6월항쟁의 불을 계속 살리게 된 것이죠. 6월항쟁사를 얘기하면서 서울 중심으로 평가되고, 부산의 역할이 별로 부각되지 않고 있는데요. 실제로는 6월항쟁의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때 부산이 했던 역할은 굉장히 컸다고 생각해요. 그 중심에 노 대통령이 계셨고 나도 옆에 곁다리로 있었고요. 그게 참 보람이었죠.

그 다음에 개인적으로 뿌듯했던 것은, 노 대통령 탄핵 때죠. 청와대 그만 둔 상태에서 밖에 있었기 때문에 시청 앞에서 열린 탄핵반대 촛불집회 여러 번 가봤는데, 정말로 참 엄청난 인파들이 모였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서 역시 노 대통령이 일반시민들 가슴속에 우리가 나가야 할 역사의 방향, 시대정신, 그런 것들의 상징적인 존재구나, 하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죠. 그때 참 뿌듯했어요.

힘든 순간은 역시 재임 중에 비난받을 때죠. 특히 우리 쪽 진영으로부터도 막 비난받을 때 힘들었지요. 대연정 제안으로 청와대 안에서도 동의가 별로 없었고, 밖에서는 정말로 비난이 많았는데 할 말이 없는 거에요. 그때 힘들었고요. 마지막으론 서거 전 수사 과정에서 진보적인 언론매체의 무책임한 비난들, 참으로 가슴 아팠습니다.”

- 어려서부터 모범생이었죠?
“대체로 공부는 잘한 편이었는데, 모범생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학교 다닐 때 별명 ‘문제아’…자주 처벌

- 네? 정말인가요? 안 믿겨지는데요.
“내 별명이,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아’였어(웃음). 학칙 같은 거, 이런 식의 규칙들하고 잘 안 맞더라고요. 내가 법률가가 된 거는 진짜 아이러니한 거에요. 실제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도 늘 처벌당하고 그랬었어요. 내가 상을 받게 된 것은, 군대 가니까 상 주데요. 어쨌든 모범생이진 않았어요.”

-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부모님이 원래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들이죠?
“고생했고, 극도로 가난했지요. 보통 피난 온 분들 가운데 성공한 분들도 많지만 6.25 전쟁 전에 내려온 분들 말고 전쟁 통에 피난 온 분들은 성공한 분들보다 역시 피난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한 분들이 훨씬 많지요. 우리 부모님도 아무 연고 없는 곳에 내려와서 피난살이 했지요. 아마 그런 것 때문에 사회 부조리랄까 그런 것에 대해서 일찍부터 저항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가난 속에서 부모님들이 정말로 참 대단한 교육열로 공부를 시켜준 덕분에 이렇게 됐죠.”

- 왜 법대에 가셨습니까? 처음부터 법률가가 되길 원했나요?
“법률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사실은 내가 하고 싶어 했고, 학교 다닐 때 제일 좋아하고, 또 성적이 좋았던 게 역사 과목이어서,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죠. 그러나 그때 우리 집안 형편이 ‘학문을 하겠다’ 이런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어서 승부가 빠른 쪽을 선택을 했지요.”

- 그렇게 해서 법대를 간 사람들이 사법고시라는 굉장히 빠른 코스로 자기 꿈을 이루려고 하는 데에는 부모님의 열망이든 본인의 열망이 진하게 담겨 있어서 부조리에 맞서고 정의로운 길을 택하기는 대개 쉽지 않은데요. 어떻게 해서 운동의 길로 접어들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고시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현실에 대한 영합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삶 자체를 거부하고, 그런 삶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도서관에 왜 있냐고 나무랄 때였지 않습니까?

게다가 유신헌법이 생기고 나니까 갑자기 모든 법 교과서가 바뀌는 거에요. 법전도 바뀌고. 그 전까지 공부했던게 다 소용 없어. 우리 헌법학을 가르쳤던 교수님이 그 긴 휴교 기간 동안에 유신헌법 책을 다시 쓰시고는, 복교가 됐을 때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하고 눈을 마주치지를 못하는 거예요. 강의 내내 천장을 쳐다보면서 하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법학이 학문이냐?’ 그런 식의 회의가 아주 강했지요.

어쨌든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은 머리가 일찍 깨서 고등학교 즈음부터 있었는데, 그래도 남 앞에 나서는 걸 잘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체질이었어요. 아마 내가 서울법대 정도의 분위기 같았으면 워낙 운동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중간쯤 따라다니는 것으로 끝냈을 텐테요. 그 당시 경희대학교가 학생운동이 참 약했어요. 말하자면 누군가가 앞장을 서줘야 되는데, 따라다닐 사람은 많지만 앞장서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지요.”

법학에 대한 깊은 회의로 학생운동

- 대학에서 운동하던 시절, 강삼재 전 의원과 동기였지요?
“네. 그때는 잠시 (총학생회) 직선제가 됐을 때에요. 우리 쪽 학생운동 진영이 총학생회를 장악하려고 강삼재 의원을 우리 쪽 후보로 내세워서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켰죠. 총학생회 명의로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해서 유신반대 데모를 하게 돼 있는데, 정작 비상학생총회 때 강삼제 의원이 참석을 못했어요. 그러니 내가 비상학생총회와 그 이후 이어지는 시위를 주도하게 됐고 그 바람에 나는 구속이 됐어요. 강삼재 의원 역시 제적은 당했지만. 나중에 보니 강삼재 의원이 참석 못한 것은 사전에 예비구금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강삼재 의원이 나한테 늘 미안하고 빚진 기분이라고 어느 월간지 인터뷰에서 말했더라고요. 그 바람에 강삼재 의원과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게 알려졌죠.”

- 특전사 출신이시죠? 저희 대학 다닐 때엔 강제징집으로 특전사 입대한 일은 거의 없는데요. 어떻게 강제징집으로 특전사를 갔나요?
“구속이 돼서 제적을 당하고 집행유예로 석방이 되니까 영장이 나온 거예요. 신체검사도 안 받은 상태에서. 재학 중에 마구 끌어가지는 못할 때여서 제적을 안 당했으면 연기 혜택을 볼 순 있었는데, 제적을 당했으니 신체검사도 없이 강제징집으로 입영을 할 수 밖에요. 그때 강제징집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전부 나처럼 시위를 주도했거나 집시법 위반 이렇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들 최전방 또는 기갑부대 이런 쪽으로 보내서 고생하도록 했어요.”

- 입대해서 수중폭파, 스킨스쿠버 등 여러 가지로 (신체적으로) 강한 남자가 돼서 나오신 거 아닌가요?
“나는 특전사가 체질에 맞았어요.”

- 네? 정말이요? 어떤 면에서요?
“내가 군인으로서 굉장히 자질이 있더라고요. 전혀 몰랐던 능력이었는데, 사격 특등사수, 수류탄 투척선수, 전투수영, 거기다 공부까지. 부대 안에서 한자 제일 많이 알고, 영어도 제일 많이 알고(웃음). 어쨌든 아주 유능한 군인이었어요.”

- 비록 강제로 들어간 군대지만 굉장히 역량을 발휘하셨군요.
“대접을 받았어요. 강제징집 대상자라 군내 정보기관에서 동향보고를 하게 돼 있는 대상자인데도 작전과에 근무하면서 시위전력자에겐 맡기지 않는 일도 맡기고.”

특전사에선 모범군인…사격, 수류탄 특등급

- 사법연수원 차석으로 사법고시 되셨는데, 굳이 부산으로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성적도 괜찮았지만 (사법고시 합격자가 적었던 시절이라) 누구나 임용되던 시절이고, 바로 변호사를 하는 게 아주 드문 시절이었어요. 성적이 좋았는데도 변호사 바로 하게 됐다고 하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로펌을 비롯해서 몇 군데 로펌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었어요. 요즘은 고용변호사 처우가 별거 아닌데, 그 시절엔 귀했으니까 차량제공이라든지, 3년간 근무하면 미국 로스쿨 유학을 보내준다든지 조건들이 근사했어요. 그 길을 택하면 국제 변호사, 이런 길로 가는 거지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일반 사건을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쪽을 선택하지 않고 따로 개업하는 걸로 하고, 서울이냐 부산이냐 저울질 하고 있을 때 노 대통령님을 만난 거지요. 노 대통령님하고 동업을 선택하게 되면서 부산을 오게 된 것이고. 그러지 않았어도 부산에 왔을 겁니다.”

- 물론 인권이나 민권 노동 쪽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던 게 큰 거죠?
“그렇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고시를 한 것이고, 고시나 변호사의 길도 그 연장선에서 하고 싶었죠.”

- 당시 인권-노동변호사의 길은 험난했을 텐데 가족들의 충분한 양해를 받았나요?
“한 번씩 때때로 ‘왜 다른 변호사들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하냐.’ 이런 불평을 했던 걸로 봐선 충분히 이해해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받아들여줬던 것이, 우리 집사람만 해도 내가 구속되고 하는 걸 봤었거든요. 그런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법고시 합격해서 변호사가 된 것만 해도 엄청 고마운 거지요. 대체로 다 당연한 일로 그렇게 받아들였죠.”

- 학교 다닐 때 사모님 만나셨던 건가요?
“네.”

- 성악을 전공하지 않으셨나요? 사모님이?
“캠퍼스 커플이에요.”

- 사모님도 운동을 같이 하셨나요?
“아까 내가 주도했다던 비상학생총회에 참석했어요. 그런 집회에선 여학생도 한 명 나와서 발언해야 하지 않습니까? 시국토론이니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 거지만 (주최측은) 중간에 발언이 끊길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발언자들을 준비하고 하잖아요? 그때 여학생도 필요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결국 하지는 않았는데 우리 집사람하고 집사람 친구 과대표 하는 두 명한테 부탁을 했어요. 그때는 알았어요. 교제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고. 우리 집사람이 대학교 1학년 때 나를 만났고, 나는 그때 곧바로 구속됐으니까 집사람은 내 면회 다니는 것으로 나를 사귀기 시작했지요. 군대 면회 오고 나중에 해남 절에 가서 공부도 했는데 거기도 면회 오고.”

부인과는 캠퍼스 커플…징역과 고시 뒷바라지

- 변호사 하길 잘했다는 사건들이 많으실 텐데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에 있는 사건은.
“부산 경남 울산 창원 전체에 인권변호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나하고 고작 서너 분 계셨는데, 다른 분들이 정치로 들어가고 난 다음에 나 혼자 남았거든요.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울산 창원 거제 이런 쪽의 시국사건 노동사건을 내가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지요. 대한민국에 나만큼 노동시국 사건을 많이 한 변호사 없어요. 그런 중에서 대체로 학생들 사건보다는 노동사건이 보람 있었지요. 노동사건은 그 사람들의 삶이 우러나오기 때문에 고생은 해도 보람이 크죠. 기분 좋았던 것은 해고당한 퇴직자들 무효 소송에서 이겨서 복직될 때죠.”

- 청와대 민정수석 계실 때나 비서실장 하실 때나 대단히 자신에게 엄격하셨고 가족이나 주변 분들한테도 엄격하게 하셨습니다. 집에서 자녀들 키울 때도 그러셨나요?
“내가 집에 요구한 것은, 변호사지만 그래도 인권 변호사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의 수준을 분수에 넘게 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 수준으로 유지해 달라. 그거 말고는 특별히 집에서도 그렇게 한 건 없어요. 애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키운 편이지요. 하고 싶은 대로. 심지어 큰 애가 인문계에서 공부를 꽤 했는데 고3 올라가서 미대로 가겠다고 해서 그것도 허용을 했으니까요.”

- 실망스럽진 않으신가요? 뜻밖의 전과와 선택이.
“인문계 했을 때도 법대를 가서 고시공부를 시키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변호사 시절에 사건 보따리를 집에 가지고 가서 밤늦게까지 기록을 보고 하는 것이 다반사여서 애들도 변호사 이미지가 굉장히 힘들고 고생하는 직업으로 각인이 돼서 그런 꿈도 원래 가지지 않았죠. 나는 나대로 내 삶이 고통스러워서 애들은 그렇지 않는 삶으로 살기를 바랐는데 자기들 좋아하는 대로 하니까 좋지요.”

- 문재인하면 도덕성, 원칙, 강직, 권력과 사심을 추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자기절제나 관리가 힘들지 않습니까?
“이게 쉬운 거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유연하게, 능력 있게 하는 게 어려운 것이지, 지키기만 하는 게 제일 쉬운 거죠.”

- 청와대 재임 중에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단히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학생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사회의 부조리나 불의를 비판하려면 우리 스스로 도덕적이어야 되는 거지요. 그런 식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있었는데, 나는 다른 직책을 맡은 게 아니라 처음에 민정수석이었거든요. 국민들이 그 당시에 이전 두 정부의 권력형 비리 등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이 굉장히 높지 않았습니까? 어찌 보면 노 대통령 당선도 국민들의 열망 때문이었구요. 그런 정부의 민정수석을 맡았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민정수석으로서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지요.”

청와대 있는 동안 저축 다 까먹어

- 청와대 계실 때 재산공개 보니까 많이 벌어놓지 못하셨던데 경제적으로 괜찮은가요?
“대체적으로 괜찮지 못하지요. 괜찮지 못하다고 하면 더 힘든 서민들께 욕 들을 얘기지만. 어쨌든 내가 그동안 저축이 있었으면 변호사도 당분간 하지 않고 살고 싶었는데, 저축 조금 있던 것을 청와대 있을 동안 다 까먹었어요. 나는 늘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생계상 변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아마 안 그랬으면 양산보다 더 깊숙한 시골로 들어갔을지 몰라요. 지금 집은 병행(시골생활과 변호사 출퇴근)이 가능한 정도로 잡은 거지요.”

- 양산 가신 것은 평소 꿈꾸셨던 전원생활 때문만은 아니죠?
“그러기도 했고 청와대 있을 때 건강도 많이 상하기도 했구요. 또 건강 못지않게 우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잖아요. 정말로 열심히 했는데 평가받지 못했고, 아주 가혹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게 됐으니 할 말 없게 됐고, 그래서 그때만 해도 여러 가지 허망하다는 생각도 했고…. 그래서 세상하고 조금 거리를 두면서 쉬고 싶었어요. 세상하고 영 그만둘 순 없고 양산 정도 간 거지요.”

- 지금 전원생활에 만족하세요?
“나는 마냥 좋은데 우리 집사람은 서울출신이라서 아주 힘들어 하지요. 우선 적적해 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게다가 내가 없으면 무섭기도 하고. 마당에 뱀도 있고 방 안에 지네가 들어오기도 해요. 그 놈의 지네가 내 눈에 먼저 띄면 될 텐데 꼭 집사람 눈에 먼저 띄어요. 많이 적응이 되면서 다른 길이 없다고 체념도 하니까 요즘 많이 좋아졌네요.”

- 원래 등산, 바둑, 스킨스쿠버 참 좋아하셨지 않습니까?
“청와대 들어가기 전엔 등산, 바둑, 스킨스쿠버가 취미였죠. 바둑하고 스킨스쿠버는 청와대 들어간 이후 한 번도 못했어요. 그리고 등산은 작년부터 못했지요. 대통령 수사가 시작된 이후로 등산도 못하고 있어서 취미라고 말을 하기가…. 취미가 없어졌어요. 우리 집이 산자락이라서 집주변 산책하고 있는 정도로.”

- 청와대 있으면서 여기저기 몸 많이 상하셨는데, 괜찮으신가요?
“혈압, 눈, 이, 여러 군데서 동시다발로 그 전에 없던 것들이 생겨나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손녀 보고서 영낙 없는 할아버지

- 얼마 전 손녀 보셨는데 축하인사 못 드렸습니다. 좋으세요?
“엊그제 백일도 했었어요. 집에도 며칠 있고 했는데 완전히 영락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됐지요. 애가 웃고 하면 깜빡해 가지고. 신기해요. 우리 애들 낳았을 때도 신기하긴 했는데 애가 또 애를 낳으니까 진짜 신기하더라고요.”

- 지금 팬 카페가 두 개에 회원이 2400여명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인데 성격상 참 많이 부담되실 것 같아요. 미안하기도 할 것 같고요.
“만든다고 할 때 안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우선은 내가 그럴 만한 존재도 아니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이런 거 하려고 하면 회원들과 사이에 서로 소통하고 교류가 되면서 서로 좋아야지요. 예를 들면 연예인이라든지 정치인이라든지 그러면 카페 회원들은 자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해서 좋고, 또 대상은 그걸 통해서 도움받기도 하고, 서로 좋은데 나는 정치할 것도 아니고 하니까요. 그런 뜻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 분들이 ‘아무 상관없고 누가 안 되게 하겠다. 관여할 필요 없이 가만히 계시면 된다’고 하면서 시작들을 하셨어요. 그래도 나로선 부담스럽고, 미안하고, 고맙기도 하고요.”

여생은 노무현 대통령 기념사업에

-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었고, 정치적 동지가 대통령이 됐고, 참여정부의 중추역할을 하며 보람을 갖고 있고, 사회적으로 평판과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계획이나 다른 욕심이 없으니 남은 소망이 뭔지 궁금합니다.
“나는 참여정부 동안에 내가 충분히 해야 될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국정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는데요. 능력이 있고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있는 힘을 다했어요. 정말로, 건강도 다 상하면서 내가 가진 역량을 다 바쳤다고 생각하거든요.

퇴임하고 난 이후에는 세상하고 거리두면서 조용하게 살겠다고 생각했고, 양산 들어간 것도 2008년 2월 25일이 대통령 퇴임하는 날이었어요. 대통령 모시고 봉하 갔다가 귀향행사 끝나고 밤늦게 양산에 들어갔는데, 어쨌든 그것으로 일단 공적인 사회적 활동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조용하게 살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이후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런 일(노 대통령 서거)이 생겼고, 나와 대통령과의 관계라든지 참여정부에서 내가 했던 역할 때문에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는 상태라서,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지요. 노 대통령 기념사업이 우리 대에 다 끝날 일은 아니겠지만 계속 발전해 나가도록 분명하게 토대를 구축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참여정부 5년에 대해서 뭔가 꼼꼼하게 복기하는 작업이 이뤄진다면 거기에 참여하는 정도가 내게 남은 소망이지요.”


※ 이 글은 <양정철닷컴>과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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